[몽촌토성 인터뷰 1–1] 초보 귀농꾼

Seeyong Lee
12 min readSep 1, 2017

대추나무 사랑걸렸네.

우리나라 TV 역사에 남을 장수 프로그램이다. 1990년부터 2007년까지 17년간 대한민국의 농촌생활을 그렸다. 우리나라 산업화 발전이 막바지에 이르고 제3의 물결로 넘어가는 시기와 동일하다.

당시만 해도 농촌에는 나이 많은 어르신분들만 가득하고 젊은 사람들은 도시에 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시대가 변했다. 아니, 변하고 있다 아직도. 오히려 젊은 청년들이 농가로 내려와 창의력과 기술을 농업에 적용하거나 새로운 방식의 유통/소비 방식을 제안하기도 한다. 농가로 ‘내려온다’라는 표현을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다.

왜 귀농을 했을까

요르단에서 가이드 생활을 하다가 충북 보은으로 귀농해 대추 농사를 짓는 부부가 있다. 이곳에 연고가 있지도 않고 아는 사람도 없었다. 본인들이 누리고 싶은 삶을 쫓아 ‘내려왔다’. 궁금했다. 어떤 연유로 요르단에서 가이드를 했을까. 왜 귀농을 했을까. 이들의 스토리가 궁금했다. 질문이 꼬리를 물어 왜, 왜, 왜 리스트가 작성됐다.

몽촌토성의 첫 번째 인터뷰이로 이들을 택했다. 실은 부부가 인터뷰를 허락해줬다. 10월의 날 좋은 개천절. 대추나무에 사랑과 함께 본인들의 꿈을 거는 부부를 만나러 충북 보은으로 ‘내려갔다’.

하울농장 나희성 이새봄 부부

각자 소개를 부탁합니다.

함께: 충청북도 보은군 사내면 하울 농장 사장 이새봄(아내, 이하 봄), 하울지기 나희성(남편, 이하 나)입니다.

하울 농장 이름이 예쁩니다. 무슨 뜻인가요?

나: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먼저 사장님께서 말씀해주시죠.

봄: ‘하울’이란 이름은 여동생이 먼저 사용했어요. 대전에서 ‘하울 커피 공방’을 운영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울타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 그리고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생각하며 지었습니다. 지금은 보은에서 대추 농사를 짓고 있지만 훗날 ‘하울의 움직이는 성’처럼 ‘하울의 움직이는 농장’이 되어 다른 농사를 짓겠다는 의미로 이름을 지었어요.

로고도 귀엽습니다. 직접 디자인했나요?

봄: 요르단에서 가져온 아랍 후추통 두 개가 있는데, 이에 착안해 대추 모양과 함께 만들었어요. 디자인은 ‘크몽(https://kmong.com/)’이라는 플랫폼에서 저렴한 가격에 재능 기부받았습니다.

나: 두 명의 캐릭터가 있습니다. 우리 부부 모두 중동에서 살다 왔기 때문에 그 지역 유목민 전통 복장에 익숙해요. 그 특징을 살리려 했는데 요새 IS로 인해 대중의 인식이 좋지 않아서 지금 키우고 있는 대추를 중점적으로 캐릭터를 만들었어요.

요르단에서 왔다고 들었습니다. 요르단에서 어떤 일들을 하셨나요?

나: 저는 2007년 한국 국제협력단(이하 KOICA)의 봉사 단원 자격으로 2년간 요르단 농림부에서 봉사했습니다.

봄: 저는 2004년 9월에 단기선교로 요르단에 갔었어요. 약 1년 동안 요르단의 마하타(Mahatta)라는 지역의 이라크 난민 학교에서 영어와 컴퓨터 수업을 도왔습니다. 머무르는 동안 아랍어도 함께 공부했어요.

코이카 농림부 시절 나희성
마하타 난민 학교 당시 이새봄

그럼 두 분은 요르단에서 처음 만났나요?

함께: 네.(웃음)

나: 요르단 수도 암만(Amman)에 두와르 마디나라는 곳 아파트먼트에 살았는데 나는 2층, 아내는 대각선 3층에 살았습니다. 아랫집 남자 윗집 여자로 처음 만났어요.

누가 먼저 대시를 했나요?

나: 아직까지도 그 부분에 대해서 명확히 정리를 못했어요.(웃음) 가정의 평화를 위해 내가 먼저 했다고 하겠습니다.

봄: 실제로 당신이 먼저 하셨어요.(웃음)

네 그런 걸로 하겠습니다.

부부가 처음 만났던 요르단 두와르메디나 아파트
연애시절 시리아 배낭여행

두 분 모두 요르단에서 가이드를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계기로 시작하셨나요?

봄: 1년 간의 단기선교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보고를 했어요. 그때 대부분 사람들이 중동에 대해 많이 모를 뿐 아니라 편견과 오해를 가지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보통 ‘열사의 땅’, ‘테러리스트’라는 어두운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지만 중동에는 꼭 그런 모습들만 있지 않음을 얘기하고 싶었어요. 이런 연유로 가이드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그 시점에 2002년 겨울 방학, 키부츠(Kibbutz)에서 만난 친했던 유학생이 이스라엘 가이드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고 이후 그분을 통해 가이드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나: 2009년 10월 KOICA 임기가 종료되어 이후 진로에 대해 고민했어요. 다시 한국에 돌아가 일반 직장을 다닐까 생각했지만 이전 한국 직장과 학교에서 사람들 간의 부딪힘, 끝없는 경쟁으로 인한 괴로운 삶을 경험했기에 결정을 내리기 쉽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당시 여행사 사장님이 나를 좋게 보시고 가이드를 직업으로 삼을 생각이 없는지 물어보셨어요. 일반 가이드였다면 할 수 없었겠지만 요르단에서 신앙을 가지고 난 후였기 때문에 성지순례 가이드에 도전했습니다.

가이드는 말 그대로 사람을 이끌어야 하는 직업인데요, 본인 성격에 맞았나요?

봄: 내 성격에는 맞지 않았어요. 2 ~ 3년을 울었던 것 같아요. 신앙이 있고 가이드 내용이 성지순례라서 버틸 수 있었습니다. 지식이 채워지고 준비가 되어야 말을 하는 성격이라 자료를 모으고 공부하는 시간이 필요했어요.

나: 저도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이 너무 싫어요. 하지만 어떡하겠나. 투어를 시작하고 버스에 올라타 문을 닫고 출발하면 도망갈 곳이 없지요. 다만 스승님 두 분이 가이드 노하우를 잘 가르쳐주셔서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인성만 좋으면 할 수 있다고 해서 착한 척을 많이 했어요(웃음).

공부를 많이 했겠어요.

봄: 네. 남편 말을 인용하면 요르단의 역사는 지저분합니다(웃음). 한 나라가 아닌 주변국이 지속적으로 침략하고 통치하다 보니 많은 역사들을 공부하느라 시간이 걸렸어요.

나: 저에게는 복잡한 역사들보다 성지순례라는 사실이 어려웠습니다. 신앙의 햇수가 짧았던 때에 성지순례를 오시는 목사님, 권사님들 앞에서 성경 이야기를 하려고 하니 많이 어려웠어요. 초기에는 멘트를 커닝 해가며 버텼습니다.

요르단 가이드 시절 나희성

가이드라는 직업이 가진 특별한 보람이 있었을 것 같아요.

봄: 성지순례에 모두 신앙이 좋은 분들만 참여하지는 않아요. 아내 손에 이끌려 억지로 오시는 남편들도 있고, 당시 일반 여행상품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성지순례 프로그램을 통해 여행하시는 분들도 있었어요. 더군다나 성지순례 일정은 녹록지 않습니다. 하루에도 국경을 몇 번씩 넘나들고 높은 산도 타고 잠도 많이 못 자요. 그렇게 힘든 일정을 억지로 소화하고 나서 참여한 분들이 보여준 반응에 보람을 느꼈습니다. 캐리어를 소주병으로 가득 채워 왔다가 일정을 마친 후 호텔방에 모든 소주를 버려두고 왔다는 사람, 가이드해준 내용에 감동받았다고 말하는 사람, 이 직업은 당신에게 천직이라고 말해주는 사람. 그렇게 반응해주실 때 보람 있었어요.

나: 저도 비슷합니다.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데요. 성지순례를 오시는 할아버지 할머니 권사님들은 평생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시다가 일생에 한 번 멀리까지 나오신 거예요. 분명 그분들의 신앙의 깊이가 훨씬 깊을 텐데 일정이 끝나면 내 손을 꼭 잡으시며 이곳에 오기를 잘 했다고, 나희성 씨를 알게 되어 정말 기쁘다고 말씀해주실 때 보람을 느꼈습니다.

가이드 시절 이새봄

그렇게 요르단에서 지내다가 지금은 충북 보은에서 살고 있어요. 요르단에서 직업을 그만두고 한국에 오게 된 계기가 있나요?

봄: 요르단에서 11년간 가이드 생활하며 지냈는데 내게 성지순례 가이드를 가르쳐주신 이상익 사장님이 2년 전 뇌출혈로 돌아가셨어요. 함께 차를 타고 가던 중 갑자기 쓰러지셨고 바로 병원에 도착했지만 다음날 돌아가셨습니다. 일을 계속할 자신이 없었어요. 그 일을 좋아했고 요르단에 사는 것이 즐거웠지만 당분간은 일을 하기 싫었어요. 이 계기로 제 짝꿍(남편)과 이야기를 깊게 나눴습니다. 우리가 있던 곳(요르단)이 생각보다 위험하지는 않지만 한국과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만약 가족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일이 다 끝나고 난 후에 도착할 수 있었지요. 앞으로는 가족과 많은 시간을 갖자는 의사결정을 하고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나: 저도 약 10년간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 떨어져 지냈었어요. 물론 요르단에서 또 한 명의 소중한 가족을 만났지만 그럼에도 한국의 가족들에게 잘 못해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불어 이상익 사장님께서 갑자기 돌아가신 사건, 당시 직장생활에서의 스트레스가 겹치며 이렇게 살다가 객사(客死)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한국에 들어오게 됐습니다.

누가 먼저 한국으로 들어가자고 이야기를 꺼냈나요?

나: 아무래도 저예요.

처음 이상익 사장님과 만났을 때 at 요르단

특별히 귀농을 택한 이유가 있나요?

나: 제가 아내에게 프러포즈할 때 이야기했던 계획입니다. 나중에 시골에 내려가 귀농을 할 텐데 나한테 시집을 오겠냐고 물었어요. 그리고 아내는 오케이라고 했어요.

봄: 근데 이렇게 일찍 내려올 거라고는 생각 못했습니다. 원래 50세 전후로 생각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기억이 나는데 이렇게 일찍 이뤄질 줄 몰랐어요.(웃음)

나: 많은 대한민국의 직장인 분들이 힘겹게 살아가고 있겠지만 나는 그 안에서 버티며 살아갈 자신이 없었습니다. 본래 전공이 농업 분야여서 오랫동안 흥미를 가지고 있었던 농사를 지어야겠다 생각하고 무작정 귀농했습니다. 원래 무식하면 용감하지요.

프러포즈하고 얼마 뒤였나요?

나: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나서 싸울지 모르지만 약 4 ~ 5년 됐습니다.

봄: 아니죠 우리 결혼한 지가 언젠데.

나: 아.. 그럼 7년..?

그럼 7년으로 하겠습니다.

나: 네.

봄: (웃음).

정확히 언제 이곳에 왔나요?

나: 전입 신고는 작년 2015년 7월 6일에 했습니다. 아내는 요르단 생활을 접고 6월 30일에 한국에 들어왔고, 나는 4월에 먼저 내려와 평택의 한 귀농 교육원에서 두 달 동안 교육을 받았습니다. 당시 교육 과정의 견학, 실습 장소가 이곳 보은이었어요. 그때 보은을 귀농지로 택했습니다.

귀농은 비단 부부 둘 뿐 아니라 가족들과의 상의가 필요할 텐데요. 가족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나: 우리 부모님은 오케이 하셨어요. 형과 동생도 약간 걱정했지만 결국 동의하였고요. 다만 장인어른과 장모님께서는 반대 아닌 반대를 하셨습니다. 더군다나 아내가 맏딸이라 더 걱정을 하셨어요. 지금은 어떤 사람들보다 많이 도움을 주시는 분들이 되셨어요.

두 달간 교육을 받으며 반드시 귀농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계기가 있었나요?

나: 경력 대부분이 해외에서의 경험입니다. 만약 새로운 직장생활을 시작하면 또 해외로 나갈 것 같았어요. 아예 그 길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하기로 결정한 농업을 끝까지 해야겠다 마음먹었습니다. 솔직히 두 달간 농업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어요. 그저 교육만 받는 거지요. 그럼에도 내 마지막 길,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이라는 생각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많은 준비가 필요했을 것 같아요. 이곳에 내려와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이었나요?

나: 집 찾는 것이요.

함께: (웃음)

나: 처음에는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요. 보통 다른 분들은 10년 넘게, 적어도 2 ~ 3년은 준비를 하고 내려오는데 우리는 급작스럽게 결정하고 내려왔습니다. 요르단에 있을 때도 급작스럽게 변하는 삶에 부부가 함께 적응하는 훈련을 했는데 충북 보은에서 또 다른 요르단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하나하나 배우면서 만들어 가는 재미가 있어요.

그간 직장생활을 하면서 정해진 출퇴근 시간에 일하는 생활 패턴에 익숙했을 것 같아요. 반면 농사는 쉬는 날도 없지 않나요?

나: 처음에 아내와도 이 부분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농사는 하루 종일 밭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맞아요. 부지런해야 하죠. 다만 우리 부부는 출퇴근 시간을 정했어요. 가령 하루 8 ~ 9시간 일하면 퇴근하자는 규칙을 정했습니다.

특별히 대추를 작물로 택한 이유가 있나요?

나: 앞서 말했듯 교육 과정의 실습이 이곳(보은)에서 있었어요. 대추 농사를 배우면서 매력을 느낀 부분은 수형(樹形 : 나무의 모양)을 내 뜻대로 가꿀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내 잘못된 인생과는 다르게 바른 모양으로 나무를 가꾸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원하는 대로 수형을 가꿨나요?

봄: (웃음)

나: 한 번에 될 줄 알았는데 한 번만에 되지 않더라고요. 모든 삶과 똑같습니다. 노력이 들어가야 하고 공부도 필요합니다.

블로그를 들어가 보니 대학을 다닌다고 하셨어요.

나: 저는 대추 대학에 다니고,

봄: 저는 친환경 대학에 다닙니다.

각자 설명을 부탁해요.

나: 충북 보은 산하 농업기술센터에서 보은의 특산물인 대추를 명품 화하기 위해 설립한 곳이에요. 농가마다 농사를 짓는 방법이 다르다 보니 서로의 노하우를 공유하고 전문 농업 지식을 가르치기 위해 운영합니다. 10년 전에 만들어져 1년 과정으로 운영되는데 저는 10기예요. 전액 국비 지원이 됩니다.

봄: 친환경 대학은 보은 말고 다른 지역에도 있는 듯해요. 마찬가지로 농업기술센터에서 주관하며 1년 과정으로 작년에 시작됐습니다. 저는 2기예요.

대추대학 사진(위)과 친환경 대학 사진(아래)

귀농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계속됩니다..

  • 본 인터뷰는 인터뷰이의 허가를 받아 작성한 게시물이며 본 글의 저작권은 게시자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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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eyong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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